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교회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지만, 때로는 세상보다 더 많은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마음이 상하고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툼을 만드는 사람인가?”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두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다툼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36절 함께 읽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치열한 공방을 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지킨 바울과 바나바는 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서 머물며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울은 제1차 선교여행 때 세운 교회와 성도들을 돌아볼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은 ‘어린 양들을 향한 목자의 뜨거운 마음’, 즉 ‘목회적 돌봄의 마음’이었습니다.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온 바울은 예루살렘과 안디옥을 오가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마치 갓난아이와 같은 아시아의 성도들에 대한 생각이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고린도후서 11:28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여러분, 바울의 이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이 마음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마음, 곧 ‘목자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다른 선교지로 떠날 때 동역자를 남겨 두어 그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전도 사역에 풍성한 열매가 맺혀지게 된 것은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라, 이와 같은 ‘목회적 돌봄’에 기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목회자와 제직들이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교회는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의 성장은 성도들을 향한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헌신에 대한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인 목회자와 제직들은 바울의 ‘목회적 돌봄’을 배워야 합니다.
또 그와 더불어, 성도들은 교회 지도자의 자신을 향한 이러한 돌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돌봄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고 교회가 있음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 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가 될 때, 성도들의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제직들과 성도님들 모두 우리 동탄영락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되도록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그런데 이러한 선한 일 가운데, 한가지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37-39a절 함께 읽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여러분, 바나바와 바울은 둘도 없는 단짝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는 자에서 교회를 섬기는 자로 변화되었음을 성도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안디옥으로 초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했습니다. 또 제1차 선교여행에서 둘도 없는 동역자로 함께 사역하였습니다. 그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에 의해 헬라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그의 전령인 헤르메스로 불리울 만큼 잘 어울리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이 제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서로 심히 다투어’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심히 다투어 παροξυσμός’라는 말은 ‘감정이 폭발하여’, ‘분노가 격렬하여’라는 뜻입니다.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감정이 폭발할 만큼 깊은 갈등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들의 갈등과 결별을 바라보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교회 지도자들은 위기관리에 대하여 각별히 유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호흡이 잘 맞던 두 사람이 격한 감정의 폭발과 결별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가 자기의 생각을 굽힐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된 동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제2차 전도여행에의 마가 요한의 동행 여부에 따른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가 요한은 제1차 선교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의 수행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가 요한이 도중에 갑자기 전도 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마가 요한의 신뢰성은 크게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그를 동행자 명단에서 제외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 처음부터 생명을 내어놓는 굳은 결심을 하고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복음 전도의 일을 마가 요한과 같이 심약한 사람과 동행한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도, 마가 요한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유익하지 않음을 그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입장은 또 달랐습니다. 그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답게 사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비록 마가 요한이 이전에 큰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뉘우치고 있었고, 또 영적으로도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에게 다시 한번 선교여행에 동행하게 함으로써 이전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심히 다투어 갈라지게 된 원인은 둘 다 전도에 대한 열정이 강해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내막을 알고 보면 누가 잘못했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지나치게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금도 양보할 줄 몰랐습니다. 그동안 서로 잘 협조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다투고 마침내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지나치게 자기 생각을 고집하면 다툼과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 ‘역지사지 易地思之’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의견이 다를 때는 ‘상대방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주장도 옳다면 얼마든지 내 생각을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다툼과 분열은 ‘지나치게 자기 생각만 고집함’으로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례로, 한국 교회사는 ‘교단 분열사’라고 할 만큼 많이 분열되었습니다. 장로교만 해도 수백 개의 교단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분열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계속해서 분열되고 있는 원인의 대부분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생각만 고집하면 바울과 바나바 같은 위대한 신앙인들도 다투고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흐리지 않는 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때로는 양보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분열되지 않고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부터 할 수 있는 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약 1:19).
3. 이어지는 39b-41절에, 바나바는 배 타고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서로 심하게 다투었지만, 그러나 ‘복음을 향한 마음’만은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구브로로,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장소를 달리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여행을 떠나 교회들을 견고하게 세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두 사람이 본문의 사건 이후에 화해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전서 9:6에서 바울이 바나바의 자비량 선교를 변호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또, 골로새서 4:10에 바울이 그와 바나바와의 결별에 원인을 제공했던 마가 요한을 용서하고 그를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이 화해했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성도라고 성자는 아닙니다.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로 충돌하고 다툴 수도 있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다투는데, 하물며 성도 간의 다툼이 없겠습니까? 문제는 그러한 다툼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자주 다투지만, 어떤 때는 화해도 잘합니다. 그들은 술 한잔하면서 지난 앙금을 깨끗이 씻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화해하는 일에 참으로 서툽니다.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을 부르짖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화해하는 일에 서툴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반목하는 인간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화해에 서툴러서야 되겠습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 5:9).
그런데 혹시, 마음속에 갈라진 관계가 있습니까? 오늘 예배가 끝난 후 먼저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그 손을 주님께서 붙드실 것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오히려 그 관계를 통해 더 깊은 신뢰와 사랑이 세워질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성도는 자기 생각을 내세우기보다, 주님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다툴지라도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가정과 교회 안에서 다툼보다 화해를, 분열보다 평화를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혹, 불가피하게 다투게 되면 신속하게 화해함으로 교회에 덕을 세우고 주의 일에 매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바울과 바나바를 바라보면서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주장을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노력했지만, 혹 격한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투게 된다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먼저 손을 내미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가 평화를 만드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었으나 복음을 향한 마음을 지켰던 것처럼, 저희도 다툼이 생길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여 주옵소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성령 안에서 평화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과 교회에 평강이 임하도록,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화평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교회는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이지만, 때로는 세상보다 더 많은 다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의견이 다르고, 생각이 달라서 마음이 상하고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묻습니다. “나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인가, 아니면 다툼을 만드는 사람인가?”
오늘 본문은 안디옥 교회의 두 지도자 바울과 바나바가 ‘심히 다투어’ 갈라진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도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듣고, 다툼이 아니라 평화를 만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36절 함께 읽습니다.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치열한 공방을 하며 복음의 순수성을 지킨 바울과 바나바는 본 교회인 안디옥 교회에서 머물며 성도들에게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울은 제1차 선교여행 때 세운 교회와 성도들을 돌아볼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의 이러한 마음은 ‘어린 양들을 향한 목자의 뜨거운 마음’, 즉 ‘목회적 돌봄의 마음’이었습니다.
제1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안디옥 교회로 돌아온 바울은 예루살렘과 안디옥을 오가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지키고 성도들을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했지만, 그의 마음에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이제 막 자라나기 시작한, 마치 갓난아이와 같은 아시아의 성도들에 대한 생각이 떠나가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이러한 마음을 고린도후서 11:28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여러분, 바울의 이 마음이 이해되십니까? 이 마음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대한 마음, 곧 ‘목자의 마음’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 마음 때문에 다른 선교지로 떠날 때 동역자를 남겨 두어 그들을 돌보는 일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전도 사역에 풍성한 열매가 맺혀지게 된 것은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라, 이와 같은 ‘목회적 돌봄’에 기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목회자와 제직들이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을 때, 교회는 성장하게 됩니다. 교회의 성장은 성도들을 향한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헌신에 대한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지도자인 목회자와 제직들은 바울의 ‘목회적 돌봄’을 배워야 합니다.
또 그와 더불어, 성도들은 교회 지도자의 자신을 향한 이러한 돌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돌봄이 있었기에 오늘의 자신이 있고 교회가 있음을 인정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처럼 교회 지도자와 성도들이 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가 될 때, 성도들의 신앙이 성숙하게 됩니다. 제직들과 성도님들 모두 우리 동탄영락교회가 이러한 교회가 되도록 힘써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 그런데 이러한 선한 일 가운데, 한가지 가슴 아픈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37-39a절 함께 읽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여러분, 바나바와 바울은 둘도 없는 단짝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는 자에서 교회를 섬기는 자로 변화되었음을 성도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도록 도왔고, 안디옥으로 초빙하여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게 했습니다. 또 제1차 선교여행에서 둘도 없는 동역자로 함께 사역하였습니다. 그들은 루스드라 사람들에 의해 헬라 최고의 신인 제우스와 그의 전령인 헤르메스로 불리울 만큼 잘 어울리는 동역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그들이 제2차 전도여행을 앞두고 ‘서로 심히 다투어’ 갈라서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심히 다투어 παροξυσμός’라는 말은 ‘감정이 폭발하여’, ‘분노가 격렬하여’라는 뜻입니다.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감정이 폭발할 만큼 깊은 갈등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들의 갈등과 결별을 바라보는 안디옥 교회 성도들의 심정이 얼마나 안타까웠겠습니까? 얼마나 가슴이 아팠겠습니까? 교회 지도자들은 위기관리에 대하여 각별히 유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호흡이 잘 맞던 두 사람이 격한 감정의 폭발과 결별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원인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서로가 자기의 생각을 굽힐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본문에는, 두 사람이 결별하게 된 동기가 나옵니다. 그것은 제2차 전도여행에의 마가 요한의 동행 여부에 따른 견해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마가 요한은 제1차 선교여행 때 바울과 바나바의 수행원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마가 요한이 도중에 갑자기 전도 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인해 마가 요한의 신뢰성은 크게 의심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그를 동행자 명단에서 제외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바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결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일, 처음부터 생명을 내어놓는 굳은 결심을 하고도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복음 전도의 일을 마가 요한과 같이 심약한 사람과 동행한다는 것은 교회를 위해서도, 마가 요한 자신을 위해서도 결코 유익하지 않음을 그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의 입장은 또 달랐습니다. 그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별명답게 사람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비록 마가 요한이 이전에 큰 실수를 하기는 했지만, 충분히 뉘우치고 있었고, 또 영적으로도 성장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가 요한에게 다시 한번 선교여행에 동행하게 함으로써 이전의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주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이게도 심히 다투어 갈라지게 된 원인은 둘 다 전도에 대한 열정이 강해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내막을 알고 보면 누가 잘못했다고 비난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두 사람이 서로 지나치게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조금도 양보할 줄 몰랐습니다. 그동안 서로 잘 협조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두 사람은 다투고 마침내 결별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아무리 옳은 일이라도 지나치게 자기 생각을 고집하면 다툼과 분열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생각이 옳으면, 다른 사람의 생각도 옳을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로 ‘역지사지 易地思之’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지 의견이 다를 때는 ‘상대방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주장도 옳다면 얼마든지 내 생각을 양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땅의 모든 다툼과 분열은 ‘지나치게 자기 생각만 고집함’으로 일어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일례로, 한국 교회사는 ‘교단 분열사’라고 할 만큼 많이 분열되었습니다. 장로교만 해도 수백 개의 교단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분열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계속해서 분열되고 있는 원인의 대부분은 교회 지도자들이 자기 생각만 옳다고 고집하는데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 생각만 고집하면 바울과 바나바 같은 위대한 신앙인들도 다투고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의 본질을 흐리지 않는 한, 옳다고 생각되는 일이라도 때로는 양보하고 상대방의 의견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분열되지 않고 교회를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부터 할 수 있는 한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부탁드립니다(약 1:19).
3. 이어지는 39b-41절에, 바나바는 배 타고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은 서로 심하게 다투었지만, 그러나 ‘복음을 향한 마음’만은 같았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구브로로, 바울은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장소를 달리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도여행을 떠나 교회들을 견고하게 세웠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이 두 사람이 본문의 사건 이후에 화해했다는 직접적인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전서 9:6에서 바울이 바나바의 자비량 선교를 변호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또, 골로새서 4:10에 바울이 그와 바나바와의 결별에 원인을 제공했던 마가 요한을 용서하고 그를 자신의 동역자로 삼았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두 사람이 화해했음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 성도라고 성자는 아닙니다.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로 충돌하고 다툴 수도 있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간에도 다투는데, 하물며 성도 간의 다툼이 없겠습니까? 문제는 그러한 다툼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은 자주 다투지만, 어떤 때는 화해도 잘합니다. 그들은 술 한잔하면서 지난 앙금을 깨끗이 씻어 버리기도 합니다. 그에 비하면 우리는 화해하는 일에 참으로 서툽니다. 이것은 무언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랑을 부르짖는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화해하는 일에 서툴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를 한마디로 말하면 화해시키기 위함입니다.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반목하는 인간과 인간을 화해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예수님을 믿는 우리가 화해에 서툴러서야 되겠습니까?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우리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 5:9).
그런데 혹시, 마음속에 갈라진 관계가 있습니까? 오늘 예배가 끝난 후 먼저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그 손을 주님께서 붙드실 것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오히려 그 관계를 통해 더 깊은 신뢰와 사랑이 세워질 것입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여러분, 성도는 자기 생각을 내세우기보다, 주님의 마음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다툴지라도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가정과 교회 안에서 다툼보다 화해를, 분열보다 평화를 선택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는 혹, 불가피하게 다투게 되면 신속하게 화해함으로 교회에 덕을 세우고 주의 일에 매진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바울과 바나바를 바라보면서 선한 의도를 가졌다고 할지라도 자기의 주장을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노력했지만, 혹 격한 감정을 이겨내지 못하고 다투게 된다면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먼저 손을 내미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저희가 평화를 만드는 성도로 부르심을 받았음을 알게 하시니 감사하옵나이다. 바울과 바나바가 다투었으나 복음을 향한 마음을 지켰던 것처럼, 저희도 다툼이 생길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서로를 용서하고 화해하게 하여 주옵소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내려놓고, 성령 안에서 평화의 일꾼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가정과 교회에 평강이 임하도록,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화평의 주인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