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6.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욥기 4장부터는 욥에게 있어서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인한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열은 엘리바스는 나쁜 마음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욥을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틀린 말을 해서가 아니라, 지금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좋은 의도와 바른 말이 항상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고난받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1-2절 함께 읽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엘리바스의 이 말은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네게 말을 걸면 너는 싫어하겠지만, 그래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네가 하는 말을 들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욥을 무척 위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상대를 위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말하고 싶은 욕구를 앞세우는 태도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에의 욥에게는 충고가 아니라, 침묵과 동행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상황에 대한 설명과 정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감내해 줄 사람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충고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할 때, “이 말은 꼭 해 줘야겠다”라는 마음이 들 때, 잠시 멈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나 충고의 말인지, 침묵인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엘리바스의 말은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욥은 과거에 많은 사람을 도왔습니다. 계속되는 4절에 기록된 것처럼 넘어지는 사람을 일으키고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모습을 기준으로 현재의 욥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5절에 “네가 예전에 그렇게 남을 도왔으면서, 왜 정작 네가 고난을 당하니까 이렇게 무너지느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옳아 보여도 고난 중인 사람의 마음에는 칼처럼 꽂히는 말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게 만듭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이성적인 충고가 아니라 공감입니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너답지 않다”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부담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의 신앙으로 현재의 고통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하나님,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마음을 주소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6절 함께 읽습니다.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엘리바스는 욥의 신앙을 인정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느냐.” “너는 바르게 살지 않았느냐.” 겉으로 보면 참 좋은 말입니다. 욥의 신앙을 칭찬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이어질 말을 위한 서론이라는 데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이 말을 통해, 욥이 지금 흔들리는 모습을 이상한 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르게 살던 네가 왜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느냐”라며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신앙을 기준으로 던지는 질문은 위로가 아니라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그래도 당신은 믿음이 있잖아”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7절 함께 읽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이 말씀은 엘리바스가 가진 신앙의 핵심입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논리적으로는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로 보면 너무 극단적인 주장입니다. 성경은 많은 사례를 통해 의인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형통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욥도 바로 그에 대한 사례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문제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신의 지식으로 단정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8절 이하에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을 말합니다. “내가 보건대” 하고 전제를 하면서 악인은 반드시 망함을 자연의 법칙을 빗대어 주장합니다. 아무리 강해 보여도 악인은 결국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 자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지금 욥에게 필요한 말은 아닙니다. 까닭없이 고난받는 사람 앞에서 일반적인 비유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엘리바스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고난 앞에서 자기 경험을 쉽게 꺼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경험보다 필요한 것은 공감이다.
오늘 기도하실 때, “고난받는 이웃을 위해 충고하기 보다는 중보기도하는 위로자가 되게 하옵소서”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고난 받는 사람 앞에서 말이 앞서지 않게 하시고, 판단이 앞서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입술을 무겁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금요일: 새끼손가락 기도> 소지, 곧 새끼손가락은 가장 작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독거어르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기도 제목과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이웃과의 삶에서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속건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1.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2.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3.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4.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5.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 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
6.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7.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8. 내가 보건대 악을 밭 갈고 독을 뿌리는 자는 그대로 거두나니
9. 다 하나님의 입 기운에 멸망하고 그의 콧김에 사라지느니라
10. 사자의 우는 소리와 젊은 사자의 소리가 그치고 어린 사자의 이가 부러지며
11. 사자는 사냥한 것이 없어 죽어 가고 암사자의 새끼는 흩어지느니라
욥기 4장부터는 욥에게 있어서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사람의 말로 인한 또 다른 고통이 시작됩니다. 가장 먼저 입을 열은 엘리바스는 나쁜 마음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욥을 위로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틀린 말을 해서가 아니라, 지금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는 데 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좋은 의도와 바른 말이 항상 위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고난받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먼저, 1-2절 함께 읽습니다.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대답하여 이르되 누가 네게 말하면 네가 싫증을 내겠느냐,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
엘리바스의 이 말은 “지금, 이 상황에서 누가 네게 말을 걸면 너는 싫어하겠지만, 그래서 말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네가 하는 말을 들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구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욥을 무척 위하는 것 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상대를 위하는 마음보다 자신의 말하고 싶은 욕구를 앞세우는 태도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에의 욥에게는 충고가 아니라, 침묵과 동행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상황에 대한 설명과 정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함께 고통을 감내해 줄 사람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그런데 엘리바스는 ‘지금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가장 힘든 순간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충고하는 경우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누군가를 위로하려고 할 때, “이 말은 꼭 해 줘야겠다”라는 마음이 들 때, 잠시 멈추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상대방에게 필요한 것이 위로나 충고의 말인지, 침묵인지를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이어지는 3절 함께 읽습니다.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엘리바스의 말은 논리적으로는 맞습니다. 욥은 과거에 많은 사람을 도왔습니다. 계속되는 4절에 기록된 것처럼 넘어지는 사람을 일으키고 붙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과거의 모습을 기준으로 현재의 욥을 판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5절에 “네가 예전에 그렇게 남을 도왔으면서, 왜 정작 네가 고난을 당하니까 이렇게 무너지느냐?”라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말은 옳아 보여도 고난 중인 사람의 마음에는 칼처럼 꽂히는 말입니다. 고난은 사람을 약하게 만들고, 이성보다 감정이 앞서게 만듭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이성적인 충고가 아니라 공감입니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너답지 않다”라는 말은 위로가 아니라 부담이 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과거의 신앙으로 현재의 고통을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하나님,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는 마음을 주소서”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6절 함께 읽습니다.
“네 경외함이 네 자랑이 아니냐 네 소망이 네 온전한 길이 아니냐”
엘리바스는 욥의 신앙을 인정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느냐.” “너는 바르게 살지 않았느냐.” 겉으로 보면 참 좋은 말입니다. 욥의 신앙을 칭찬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말이, 이어질 말을 위한 서론이라는 데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이 말을 통해, 욥이 지금 흔들리는 모습을 이상한 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르게 살던 네가 왜 이렇게 무너질 수 있느냐”라며 질문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고난 중에 있는 사람에게 신앙을 기준으로 던지는 질문은 위로가 아니라 압박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 힘들어할 때 “그래도 당신은 믿음이 있잖아”라는 말이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이어지는 7절 함께 읽습니다.
“생각하여 보라 죄 없이 망한 자가 누구인가 정직한 자의 끊어짐이 어디 있는가”
이 말씀은 엘리바스가 가진 신앙의 핵심입니다.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죄 없는 고난은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말은 논리적으로는 맞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로 보면 너무 극단적인 주장입니다. 성경은 많은 사례를 통해 의인이 고난을 받고, 악인이 형통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욥도 바로 그에 대한 사례입니다. 그러므로 엘리바스의 문제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자신의 지식으로 단정했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8절 이하에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을 말합니다. “내가 보건대” 하고 전제를 하면서 악인은 반드시 망함을 자연의 법칙을 빗대어 주장합니다. 아무리 강해 보여도 악인은 결국 무너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 자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지금 욥에게 필요한 말은 아닙니다. 까닭없이 고난받는 사람 앞에서 일반적인 비유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엘리바스처럼 우리는 누군가의 고난 앞에서 자기 경험을 쉽게 꺼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은 말합니다. 경험보다 필요한 것은 공감이다.
오늘 기도하실 때, “고난받는 이웃을 위해 충고하기 보다는 중보기도하는 위로자가 되게 하옵소서”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고난 받는 사람 앞에서 말이 앞서지 않게 하시고, 판단이 앞서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입술을 무겁게 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이끌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금요일: 새끼손가락 기도> 소지, 곧 새끼손가락은 가장 작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소년소녀가장, 독거어르신을 위해 기도합니다. 교회의 전반적인 기도 제목과 주일 예배를 위해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이웃과의 삶에서 잘못한 것은 없는지 돌아보는 ‘속건제의 삶’을 결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