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기 3장은 욥의 탄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앞부분인 1–10절에서는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그 탄식이 더 깊어집니다. 이제 욥은 단순히 생일을 저주하는 것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태어났는가?” “왜 살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고난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결국,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던진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고통의 바닥에서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1-12절 함께 읽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욥의 질문은 매우 솔직합니다. “왜 태에서 죽지 않았는가?” “왜 태어나자마자 숨지지 않았는가?” “왜 누군가 나를 받아 주었는가?” “왜 살도록 허락되었는가?”
이 질문은 인생의 의미를 따지는 철학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지금의 고통이 너무 커서 존재 자체가 짐이 되어 버린 상태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고난이 깊어지면 미래를 묻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를 묻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 “왜 태어났나요?”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욥은 이 질문을 세상에 던진 것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말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 드릴 질문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절망과 탄식 속에 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도 “왜 내가 태어났을까” “내가 왜 이 삶을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까? 그러할 때 자기 스스로를 믿음이 없다고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질문들을 들고 욥처럼 하나님께 탄식하시기 바랍니다. 답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 앞에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신앙의 후퇴가 아니라 신앙의 가장 정직한 모습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이에 대하여 깊이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어지는 13-15절 함께 읽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지금 욥은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절망의 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쉼’으로 말합니다.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지금 욥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쉼입니다. 몸은 아프고 마음은 찢어지고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래서 욥에게 있어서 죽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쉴 수 있는 자리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욥의 이 표현은 죽고 싶다는 것이기보다 너무 지쳐 있다는 것입니다. 자살 충동의 표현이 아니라, 지칠 대로 지쳤다는 표현입니다. 욥이 죽음을 “쉴 수 있는 자리”라고 고백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욥은 또 하나를 말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예외가 없다고 말합니다. 왕이나 모사나 부자나 모두 죽음 앞에 서게 된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사람의 모든 겉모습을 벗겨냅니다. 지위도 명예도 성취도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자리로 데려갑니다. 욥은 지금 이 세상이 그렇게 공평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죽음의 평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지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지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혹시 요즘 여러분의 마음에 “그냥 좀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습니까?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괜찮다”라는 말 대신에 “나는 지쳐 있다”라는 사실을 예수님 앞에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친 자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부르셔서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3. 이어지는 16절 함께 읽습니다.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너무 가슴 아픈 표현입니다. 차라리 존재 자체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지금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존재 자체가 짐처럼 느껴진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말을 한 적은 없었습니까?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내가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러한 말을 했다고 믿음 없는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을 어디에서 했느냐입니다. 욥은 이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존재가 버거워질 만큼 힘들 때 그 마음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하나님께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욥이 죽고 싶은 이유에 대하여 17-18절에 고백합니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거기서는~” 지금 여기에서는 악한 자가 소요하고, 피곤한 자는 더 지치고, 갇힌 자는 계속 억눌리지만 거기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죽음을 찬양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쉼이 없는 세상인지에 대한 탄식입니다. 욥은 지금 “사는 게 쉼이 아니라 고문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의 삶도 쉬어야 할 자리에서 더 지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가 쉼이 아니라 부담이 되고, 기도가 위로가 아니라 의무가 되고, 하루하루가 버티는 일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지금 내 삶에 쉼이 없습니다. 내 영혼이 너무 피곤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속한 욥기 3장은 욥의 믿음이 무너진 장이 아닙니다. 가장 아픈 언어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장입니다. 욥은 예배를 멈추지 않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솔직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지치고 상할 때, 여러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픈 언어로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에 대하여 깊이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존재가 버거워질 만큼 힘들 때,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부르짖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화요일: 검지손가락 기도>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쓰는 손가락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목회자들과 교회학교 교사들, 이 땅의 선생님들, 해외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 집중하여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성결함으로 모든 삶을 드리는 ‘소제의 삶’을 결단합니다.
11.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12.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13.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14.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15.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16.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17.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18.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19.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기 3장은 욥의 탄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앞부분인 1–10절에서는 자기 생일을 저주했습니다.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그 탄식이 더 깊어집니다. 이제 욥은 단순히 생일을 저주하는 것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왜 태어났는가?” “왜 살게 되었는가?” 이 질문은 특별한 사람만 하는 질문이 아닙니다. 고난이 깊어질수록 사람은 결국, 이 질문 앞에 서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 던진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고통의 바닥에서 던진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통해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시기를 축원합니다.
1. 먼저, 11-12절 함께 읽습니다.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무릎이 나를 받았던가 어찌하여 내가 젖을 빨았던가”
욥의 질문은 매우 솔직합니다. “왜 태에서 죽지 않았는가?” “왜 태어나자마자 숨지지 않았는가?” “왜 누군가 나를 받아 주었는가?” “왜 살도록 허락되었는가?”
이 질문은 인생의 의미를 따지는 철학적인 질문이 아닙니다. 지금의 고통이 너무 커서 존재 자체가 짐이 되어 버린 상태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여러분, 사람은 고난이 깊어지면 미래를 묻지 않습니다. 삶의 의미를 묻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깊은 질문, “왜 태어났나요?”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렸듯이 욥은 이 질문을 세상에 던진 것이 아닙니다. 자기 혼자말도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묻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 드릴 질문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어떤 절망과 탄식 속에 있어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혹시 여러분도 “왜 내가 태어났을까” “내가 왜 이 삶을 살아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까? 그러할 때 자기 스스로를 믿음이 없다고 정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질문들을 들고 욥처럼 하나님께 탄식하시기 바랍니다. 답을 찾으려고 애쓰기보다 하나님 앞에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솔직하게 말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신앙의 후퇴가 아니라 신앙의 가장 정직한 모습입니다. 오늘 기도하실 때, 이에 대하여 깊이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어지는 13-15절 함께 읽습니다.
“그렇지 아니하였던들 이제는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자기를 위하여 폐허를 일으킨 세상 임금들과 모사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요 혹시 금을 가지며 은으로 집을 채운 고관들과 함께 있었을 것이며”
지금 욥은 죽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절망의 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쉼’으로 말합니다. “내가 평안히 누워서 자고 쉬었을 것이니”
지금 욥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쉼입니다. 몸은 아프고 마음은 찢어지고 밤에도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래서 욥에게 있어서 죽음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쉴 수 있는 자리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욥의 이 표현은 죽고 싶다는 것이기보다 너무 지쳐 있다는 것입니다. 자살 충동의 표현이 아니라, 지칠 대로 지쳤다는 표현입니다. 욥이 죽음을 “쉴 수 있는 자리”라고 고백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욥은 또 하나를 말합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예외가 없다고 말합니다. 왕이나 모사나 부자나 모두 죽음 앞에 서게 된다고 말합니다. 죽음은 사람의 모든 겉모습을 벗겨냅니다. 지위도 명예도 성취도 아무 의미가 없어지는 자리로 데려갑니다. 욥은 지금 이 세상이 그렇게 공평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죽음의 평등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인은 지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지쳤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혹시 요즘 여러분의 마음에 “그냥 좀 쉬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습니까? 그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그러므로 “나는 괜찮다”라는 말 대신에 “나는 지쳐 있다”라는 사실을 예수님 앞에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지친 자를 책망하지 않으시고 부르셔서 새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3. 이어지는 16절 함께 읽습니다.
“또는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나는 존재하지 않았겠고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 같았을 것이라”
너무 가슴 아픈 표현입니다. 차라리 존재 자체가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지금의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존재 자체가 짐처럼 느껴진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말을 한 적은 없었습니까?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내가 없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러한 말을 했다고 믿음 없는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을 어디에서 했느냐입니다. 욥은 이 말을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존재가 버거워질 만큼 힘들 때 그 마음을 숨기지 말고 그대로 하나님께 가져가시기 바랍니다.
욥이 죽고 싶은 이유에 대하여 17-18절에 고백합니다.
“거기서는 악한 자가 소요를 그치며 거기서는 피곤한 자가 쉼을 얻으며 거기서는 갇힌 자가 다 함께 평안히 있어 감독자의 호통 소리를 듣지 아니하며 거기서는 작은 자와 큰 자가 함께 있고 종이 상전에게서 놓이느니라”
욥은 반복해서 말합니다. “거기서는~” 지금 여기에서는 악한 자가 소요하고, 피곤한 자는 더 지치고, 갇힌 자는 계속 억눌리지만 거기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죽음을 찬양하는 말이 아닙니다. 지금 이 세상이 얼마나 쉼이 없는 세상인지에 대한 탄식입니다. 욥은 지금 “사는 게 쉼이 아니라 고문 같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여러분의 삶도 쉬어야 할 자리에서 더 지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배가 쉼이 아니라 부담이 되고, 기도가 위로가 아니라 의무가 되고, 하루하루가 버티는 일이 되어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 앞에서 이렇게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지금 내 삶에 쉼이 없습니다. 내 영혼이 너무 피곤합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이 속한 욥기 3장은 욥의 믿음이 무너진 장이 아닙니다. 가장 아픈 언어로 하나님께 매달리는 장입니다. 욥은 예배를 멈추지 않았고,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솔직했을 뿐입니다.
여러분들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지치고 상할 때, 여러분이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픈 언어로 하나님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시면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에 대하여 깊이 간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존재가 버거워질 만큼 힘들 때, 하나님 앞에서 솔직하게 부르짖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말로 다 설명할 수 없고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게 하시고,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도 우리를 붙들고 계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화요일: 검지손가락 기도> 검지는 무엇을 가리킬 때 쓰는 손가락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기억하며 목회자들과 교회학교 교사들, 이 땅의 선생님들, 해외 선교사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다음 세대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을 위해 집중하여 기도합니다. 구약성경의 다섯 가지 제사를 삶에 적용하여,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성결함으로 모든 삶을 드리는 ‘소제의 삶’을 결단합니다.